[2차대전사]동부전선의 FW-190 에이스(3) 철심장의 군사학교실(전사,전략)



안녕하십니까? 철심장입니다...

전 편에 이어 Osprey 사의 Focke-Wulf Fw 190 Aces of the Russian Front 번역 제3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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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G51 in Combat1942년 9월 6일은 JG51제1비행대가 러시아 전선으로 돌아온 날인 동시에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려는독일군의 마지막 총공세의 전날이기도 했다.24시간 후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굼락 비행장이 독일군에게 점령되었고 소련의 안드레이 예레멩코 장군은 그의 전투 지휘소를 볼가강 건너편으로 옮겨야했다. 그 이후 4개월에 걸쳐 펼쳐진 폰 파울루스 장군 휘하의 독일 제6군의스탈린그라드를 둘러싼 공격과 좌절, 부활한 러시아군에 의한 포위, 처절한 전투와 전멸은 동부전선의 모든 독일군의 활동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게 되었다. JG51제1비행대는 남쪽에서 펼쳐지고 있는 전투와는 멀리떨어진 북부전선에 배치되고 새 기체에 적응하기 위해 주로 레닌그라드 남동쪽의 류반 지역에서슈밤이나 로테 단위로 전투 초계비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후 그들은 데미얀스크 포위망으로 통하는 유일한 좁은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 일멘 호수의 남쪽으로 재배치 되게 되었다.

10월, 겨울의 시작과 함께 제1비행대는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여 중부전선의 모스크바 맞은편에 있는 르체브-비아즈마 돌출부로 이동했다. 200마일 북쪽의 데미얀스크 돌출부와 같이 비아즈마 돌출부도 '절대 현지사수'의 원칙아래 일단의 독일군들이 지난 봄부터 소련군의 반격을 막아내며 버티고 있었다. 여기에서부터 Fw190의 동부전선에서의 활약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된 것이다. 그동안 그라써 대위 지휘하의 JG51제2비행대는 Fw190을 수령하는 두번째 부대로서 예싸우로 이동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전환과정은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으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다. 독일 공군은 이 새로운 위협에대처하기 위하여 제2비행대의 제4, 제5중대의 전환과정을 중단시키고 비너-노이슈타트에서 Bf109G2/Trop(열대형)을 수령하게 한 후 곧바로 이들을 튜니지아 전선으로 보내버렸다. 이 2개중대가 빠져나가 버린 공백을 메우기위해서 칼 하인츠 슈넬 지휘하의 제3비행대가 비야즈마 돌출부에서철수하여 홀로 남은 제6중대-제1비행대<1,2,3중대>, 제2비행대<4,5,6중대>, 제3비행대<7,8,9중대>이런 식으로 편제된 것 같습니다.-와 합류하여 Fw190으로의 기종전환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동안 JG51제1비행대는 점증하는 소련군의 압력에 맞서 비야즈마 돌출부를 지원하는유일한 (비록 근처의 비테브스크에 주둔한 JG51제4비행대-Bf109장비-의 지원을 받긴 했지만) 전투비행단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상대하고 있던 소련군도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독소전 개전 초반기에 대형이고 뭐고없이 단순히 수적우세만 믿고 개떼처럼 몰려들었던 모습에서 벗어나 신형기체-주로 Pe2급강하 폭격기와 Il-2슈톨모빅-들을 운용하며 좀더 작은 그룹으로, 그리고 좀더 훈련된 모습으로 정연하게 대오를 이뤄 공격을 해 오곤 했다.
돌출부 내의 5개 비행장에 대해 - 특히 약 1마일짜리 콩크리트활주로에다가 격납고, 막사, 보급소등을 완비하고 있던 두기노 기지- 소련군이 거의 논스톱으로 계속 공습을 가해옴에 따라 제1비행대의 조종사들은곧 그들이 Bf109를 몰던 시절에 세웠던 격추기록(JG51은 11월 1일에 총4000기의부대 격추전과를 기록했다.)에 새로운 킬마크들을 더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새로부대에 들어온 사람중의 하나가 하인츠 랑에 대위였다. 그는 1939년 10월에 독일에서 정찰비행을 하고 있던 영국 공군의 블렌하임 폭격기를 Bf109E를 타고 떨어뜨리면서 첫 격추를 기록했었다.

그동안 레닌그라드 전선의 JG54제1비행대에서 중대장직을 맡고 있던 그는10월26일 JG51의 제3중대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저거 제1비행대겠져~^^)'나는 1942년 11월 8일에 소련의 비아즈마에서 처음으로 Fw190을 타보게 되었다.그리고 나는 완전히 그 기체에 매료되었다. 나는 동부전선에서 쓰였던 그 기체의모든 형식을 몰아보았다. 약간은 작은 기체덕분에(제가 보기엔 Fw190이 Bf109보다 큰거 같은데여^^;;) Bf109보다 시계는 더 나았고 Bf109가 좀 더 급격한선회를 할 수 있었지만, 전반적인 운동성 은 Fw190이 더 낳았으며 만약 당신이 Fw190을 마스터 한다면 그와 맞먹는 선회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조정성으로말할것 같으면, Bf109는 조종간이 좀 무거웠던데 비해 Fw190은 맘먹은대로자유자재로 몰수가 있었다.''구조적으로는 분명히Fw190이 Bf109에 비해 우월했다.

 특히 급강하 성능은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Fw190A의 공냉식 엔진도 멧서슈미트보다 적의 포화에더욱 잘 견뎠다. 화력면에서는 형식에따라 좀 다르긴 하지만, 다른 대부분의 독일 전투기와 동등 혹은 그 이상이었다. Bf109의 엔진 구동축 탑재 기관포는확실이 더 정확한명중률을 자랑했지만, 그것은 전투기끼리 싸울때나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Bf109의 30mm기관포는 특히 급선회하면서 쏠경우에 고장이 잘 났다. 난 그런식으로 최소한 여섯대는 놓쳤을것이다.''우리의 전투기 전술 발전상의 가장 획기적인 변화는 세대가 비좁은 편대를 짰던 '케테'대형에서 4대가 네 손가락 모양으로 편대를 만드는 '슈밤'대형으로 바꾼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혁명적인 변화는 스페인 내전에서 베르너 묄더스의 주도로 발전된 것이었다. 나는 독일 조종사들이 거둔 격추기록의 큰 부분이 이 전술덕분이었다고 본다.' 랑에는 나중에 JG51의 여섯번째이자 마지막 사령관이 되며 종전까지 총 70기의 격추기록을 보유하게 된다. 그리고 그 중 한 대를 뺀 나머지 모두가 동부전선에서 기록되었다.

1942년 11월24일 , 뼈속까지 얼어드는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됨과 동시에러시아군은 르체브-비야즈마 돌출부의 북방에 전방 항공군의 지원을 받는 7개군단을 동원한 대공세를 감행하면서 독일군의 모스크바를 향한 모든 공세계획을 다 좌절시켜버렸다. 독일의 중부전선은 르체브로부터 비엘리 그리고 벨리키 루키에 걸쳐 붕괴되어 나갔다. 특히 벨리키 루키의 포위는 아주 큰 의미를 갖는것이었다. 독일군은 1941년 8월에 이 철도 집합점이 되는 도시를 점령하고 중부전선에서 가장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해왔다. 그런데 그 중요한 전략 거점이 포위되어버린 것이다. 그 지역의 유일한 전투기 부대였던 JG51의 2개 비행중대는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지원요청에 정신이 없었다. 그들은 전 전선에 걸쳐맹렬하게 달려들고 있는 소련 공군을 몰아내는 동시에 벨리키 루키의 포위된 수비군들에게 보급품을 투하하러 가는폭격기들까지 호위해야 했다. 안그래도병력이 적었지만 크라프트 대위는 제1비행대의 일부를 떼어 내서 벨리키 루키 근처의 얼어붙은 이반 호수에서 작전활동을 하도록 했다. 여기서 그들은 벨리키 루키 포위망 내의 수비군들에게 가는 Ju87 '급강하 보급기'들을 호위했던 것이다.다행히 12월에는 전환과정을 마치고 신형Fw190A4를 몰고 예싸우에서 돌아온 제3비행대와 제6중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루프트바페의 필사의 노력도 헛되이 1943년 1월1일 벨리키루키는 함락되었다. 그와 같은 기간에 르체브-비야즈마 돌출부 북방에서 작전하고 있던 JG51제1비행대 의 주력은 그들의 첫 Fw190의 전투손실을 입었다. 12월10일에 부대 통신장교로 근무하던 오르스트 리만 대위가 전사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4일후에는 크라프트 대위와 리터부쉬 하사가 대공포화에 격추당했다. 제1비행대를 5월부터 지휘해 왔던 하인리히 '가우디' 크라프트는 78기의 격추기록을 가진 에이스에 기사십자장 수상자였다. 그는 추락하는 비행기에서는 살아남았지만 곧바로 성난 소련군들에게 붙잡혀 맞아 죽었다(참 불쌍하네여...).

제1비행대가 전선으로 돌아온 직후 초계비행등을 통해 새로운 기체에 적응할 시간을 가졌던 것과는 달리제3비행대는 그러한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예싸우에서 기종 전환 훈련을 하면서 이미 공중충돌로 한명의 희생자를 낸 제3비행대는 전선으로 돌아오자 마자 바로 격렬한 전투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JG51의 조종사들은 전 중부전선에 걸쳐 점증하는 소련군의 압력을 맞아분투했다. 당시 그들은 전선의 여기저기를 비행대 혹은 중대 단위로 - 심지어는 슈밤(4대)단위 까지- 정신없이 돌아다니면서 뚫린 구멍을 막거나 급한불을 끄는 '소방대'역할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해 말까지 JG51제1비행대는 이반호수와 비아즈마 그리고 오렐을 왔다갔다하면서 작전활동을 벌였다. 자연히 사상자수도 증가했고 특히 전사한 '가우디' 크라프트 대위의 뒤를 이어 제1비행대를 지휘하고 있던 루돌프 부쉬 대위의 죽음은 비극적인 것이었다. 1월17일부쉬 대위는 JG51전투비행단장이었던 칼-고트프리트 노르드만 중령의 윙맨으로서 얼어붙은 이반호수에서 날아올랐다.
 비행중에 급선회를 하던중 노르드만 중령이 속력을 지나치게 떨어뜨렸는지 그의 Fw190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뒤집어지면서 부쉬대위의 기체에 충돌했다. 부쉬 대위의 기체는 불덩이가되어서 소련군 전선 후방으로 추락했고 노르드만 중령은 부상을 입고 간신히 독일군 지역에 낙하산으로 탈출할 수 있었지만, 이 사고로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은 그는 부상에서 회복한 후에도 계속 JG51을 지휘했지만 다시는 실전비행을 하지 못했다. (음 엄청 죄책감이 심했나보네여)노르드만 중령이 부상으로 후송된 후 JG51은 제3비행대장이었던 쉬넬 대위가 임시로 지휘를 맡게 되었다.

1943년 초반에 제3비행대는 오렐 지구로 이동하게 되었다. 1월29일 이곳에서제9중대의 귄터 샤크 대위는 아주 신나는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일단의 Ju87을호위하고 기지로 돌아가던 샤크의 슈밤은 지상관제소로부터 8대의 뫼벨바겐-'가구운반차'로서 적 폭격기를 뜻함-이 노보실의 독일군 전선을 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곧 그들은 한줄로 나란히 날아가고 있는 8대의 Pe2폭격기를 발견했고이어진 것은 샤크 본인의 말을 빌자면 '진짜 칠면조 사냥'이었다. 5분만에 8대의폭격기는 모두 불덩이가 되어 지상에 나뒹굴었고 그중 5대는 샤크가 잡은 것이었다. 거의 맨입으로 8대의 Pe2를 잡은 날로부터 10일 후 제3비행대는 매일같이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2월11일까지 샤크의 격추 기록은 30대까지올라가게 된다. 그의 주특기는 급선회하면서 사격을 하는 아주 고 난이도의 기술이었다. 2월 23일에 그는 이 기술을 맘껏 뽐낼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는데 그날이 저물때까지 JG51제1비행대와 제3비행대는 총 46대를 격추시켰고 그중 5대는 샤크가 잡은 것이었다. 그중 세대는 LaGG-3이었는데 4대가 단단한 수비진을 짜고 서로의 꼬리를 보호하며 선회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을 샤크가 그의 장기인 '급선회하면서 갈기기'로 단 1분만에 세대를 잡아 버렸던 것이다.(참고로 그때로부터 2년전 전설적인 에이스였던 베르너 묄더스는 그와같은 급기동중 사격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아마Bf109로는 힘들지 않았을까...)

전쟁이 끝날무렵까지 귄터 샤크는 총 174대의 격추기록을 세웠고(전부 동부전선에서) 나중엔 비행대장직까지 맡게 되었다. 2월이 지나고 3월이 되면서 중부지구에서의 위기는 점점 심화되어갔다. 북방에서는 데미얀스크 돌출부가 서서히 소멸되어가고 있었고 이 철수작전의 마지막 단계를 지원하기 위해 JG51제3비행대는 임시로 JG54에 배속되어 크라스노그바르다이스크(정말기네여^^;;)에 전개되었다. 그리고 독일군은 같은 3월에 르체브-비아즈마 돌출부를 다음번의 모스크바를 향한 공세의 근거지로 쓰겠다는 계획도 결국 접어야만 했다. JG51의 제1, 제4비행대는 독일 지상군의 철수작전을 초인적인 노력을 통해 지원했으며 그 결과 제1비행대는 작전 가능한 Fw190이 8대밖에 남지 않는 참상을 보이게 되었고 Bf109를 운용하던 제4비행대도 크게 사정이 나을것이 없었다. 돌출부가완전히 소멸하고 겨우 전선이 안정된 후 제4비행대는 Fw190으로의 기종 전환을 위해 후방으로 철수했고, 이제는 에리히 라이에 소령의 지휘를 받고 있던 제1비행대는 그 즈음 새로운 격전지구로 떠오르고 있던 남쪽의 브리얀스크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JG51의 조종사들은 잠깐동안이긴 하지만 모든 전투기 조종사들이 선호하는 미숀~ -freie Jagd (free hunting정도가 되는것 같은데 의미는 딱 알겠는데 마땅히 명칭이 생각이 안나내요.^^;;자유사냥??전투초계정도면 무난할것 같은데, 의견주세용~^^)를 수행할 기회를 가지게되었고 곧 2개의 이름-요아힘 '아킴' 브렌델과 요세프 '페피' 예네바인-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9중대(3비행대)의 귄터 샤크와 마찬가지로두사람 다 JG51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었지만, Bf109를 몰던 때에는 이렇다 할 전과를 거두지 못했었다. 우선, 브렌델이 1943년 봄부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그리고 그 후 2년간 그는 총 189기 격추의 기록을 세웠으며 이 전과는 모두 동부전선에서 거둔 것이었다. 특기할만한 사항은 그 기록중에 25기가 야크9이었고 무려 89기의 슈톨모빅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오스트리아인이었던 '페피' 예네바인은 1940년도 세계 스키 챔피언이었고 영국 항공전 당시 에이스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도 Fw190을 탄 후에야 그의 진정한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가 했던 하루에 7기를 잡기도 하고 단 6분만에 5기의 폭격기를 떨어뜨리는 일은 아무리 에이스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일은 아니었다. 1943년 3월 말경, 해빙기의 진흙탕으로 인해 독소 양측의 공중활동은 거의 전무한 레벨로 떨어졌지만 이는 또한 휴식을 취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리고 중부지역에서의 전반적인 군사활동 자체가 독일군 소련군 할것 없이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단순한 소강상태가 아니라 태풍-쿠르스크 전투- 이 불기 전의 고요와도 같은 것이었다. (계속)

-.- 철타곤의 철 심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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